02:17, '읽씹' 1분 34초째
채팅방 위에 초록색 실선이 아른거린다. 지훈이가 본 거다. 아니, 봤다는 말이 맞을까.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프로필 사진 속 그는 나지막이 웃으며 카메라를 응시하는데, 그 눈빛이 내게서 온전히 떨어져 있었다. 내가 본 것은 512×512 픽셀의 덩어리뿐.
내가 원한 건 지훈이 아닌, 지훈이를 설명하는 문장들이었나.
너의 표정은 내가 그린 거야
키 183cm, 왼손 엄지손톱 옆에 작은 흉터, 바지 한쪽 주머니에 항상 손이 가는 습관. 사소한 디테일이 쌓일수록 그는 점점 실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내가 만든 실재였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아직 듣지 못했는데도, 그가 웃을 때 살짝 매부리코가 드러날 거라고 확신했다. 확신이라는 말이 맞을까. 그건 욕망의 보정이었다. 프로필 한 장과 흩어진 대화들 위에, 나는 수십 번씩 페인트를 덧발랐다.
첫 만남, 19:04
홍대 앞 살롱 드 느와르. 유리창 너머로 내가 지훈이라고 믿어온 남자가 걸어온다. 검은 코트, 청바지, 번들거리는 운동화. 프로필과 똑같다. 너무 똑같아서 오히려 낯설다.
안녕하세요?
어, 네. 오셨어요.
첫 마주침은 0.8초였다. 그는 미소 지었지만, 내가 그렸던 미소가 아니었다.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았고, 손톱은 깨끗했다. 흉터는 없었다. 있어야 할 곳에 없는 흉터는, 내가 착각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왜 매번 옷을 벗었을까
채팅방에선 '연희'였다. 28세, 종로 호떡집 아들, 카톡 프로필은 검은 고양이. 만나서 알았다. 그는 실제로는 '종호'였고, 나이는 32세였다. 그는 실수였다고 했다. 처음엔.
내가 사과하면 너는 절대 화내지 않을 거라고 믿었어. 너무 순진했잖아.
종호는 연희로 살던 날들을 회상했다. 연희는 더 자유로웠다. 그는 창밖으로 보이는 자기 집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내가 연희라고 불릴 때는, 진짜 내가 아닌 것 같아서 좋았거든. 연희는 나보다 재밌고, 나보다 용감했어.
그는 연희라는 이름으로 여자들과 잤다. 연희는 능숙했다. 연희는 먼저 옷을 벗었다. 연희는 그가 되고 싶었던 그였다.
욕망은 공백을 어떻게 채우나
심리학자 윈니콧은 '과도한 투영'을 이야기한다. 상대가 비어 있는 캔버스일수록, 우리는 더 화려하게 그림을 칠한다. 프로필 사진 한 장, 짧은 소개, 몇 줄의 대화. 정보가 적을수록 빈칸은 넓어지고, 우리는 그곳에 자기 욕망의 프로토타입을 투사한다.
나는 지훈이를 사랑한 게 아니라, 지훈이가 될 수 있었던 나의 허구를 사랑한 거였다.
03:42, 다시 읽씹
나는 지훈이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를 다시 읽는다. '나는 너를 알고 싶어.' 지훈이는 답장하지 않았다. 답장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가 아는 그가 아니었으니까.
채팅방 위에 실선은 여전히 초록색이다. 지훈이는 온라인 상태다. 아니. 그의 계정만 온라인 상태다.
너는 누굴 만나러 온 거야
지금 이 순간, 어딘가의 카페에서 또 누군가가 자신의 '지훈이'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그가 프로필 사진보다 3키로쯤 통통할지도 모른다는 걸, 목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울지도 모른다는 걸 아직 모른다. 그녀는 모른 채 앉아 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걸까.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가, 아니면 자신이 만든 환영을 확인하러 가는 건가.
자네는 지금 이 순간, 화면 너머의 누군가에게 덧칠하고 있는 자기 욕망의 색깔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