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못 알아볼 거야.”
서울역 5번 플랫폼. KTX 417호가 미끄러져 들어오던 14시 52분, 지민은 남편이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지금 화장실 급해서 2층 편의점 앞에서 기다려. 5분 뒤에 올게.>
그런데 문득, 서 있던 지점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으로 다가온 남자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혹시 정지민 씨?
고개를 들자 검은 울 코트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가죽 장갑 끝에 새겨진 이니셜 M과 함께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 저기요, 민호 씨가 못 올 것 같아요. 대신 저라도 모실까 해서…
말은 끊겼지만 손은 이미 그녀의 캐리어 손잡이 위에 올라가 있었다. 지민은 잠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이름, 민호—내 남편의 절친한 대학 후배.
그녀의 가방을 든 손, 남편이 아닌 이유
왜 대부분의 아내들은 남편 대신 다른 남자의 손을 기차역에서 맛보고 싶어 할까.
‘사랑한다’는 말보다, 누군가 내 짐을 들어주는 손이 더 간지러운 걸까.
그건 단순한 배려가 아니다. 밀실 같은 공공장소에서 벌어지는 ‘오해 가능성’이 주는 쾌감. 모두가 내 남편이라 착각하는 순간, 플랫폼 위에서만큼은 너와 나, 우리 둘만의 비밀 연극이 시작된다.
Episode 1. 유리와 준석, 8년 차 부부
유리는 6개월째 출장 전날이 되면 늘 같은 각본을 되새긴다.
– 이번엔 정말 늦을 것 같아. 걱정 마, 준석이 대신 널 데리러 갈게.
준석은 남편의 친한 동아리 후배.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은 ‘너무 바쁘다’며 그를 대신 보냈다. 처음엔 당연히 거절했다가, 두 번째엔 “미안해서”라는 핑계로, 세 번째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부산행 KTX 안에서 둘은 마주 본 적이 없다. 유리는 창밖을, 준석은 휴대폰 화면을 보며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하지만 손은 종종 아래쪽 좌석 사이를 기어가 서로의 손등을 스쳤다.
내 남편은 내 옆에 없지만, 남펹이 아닌 남자가 내 옆에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심장이 떨려서…
Episode 2. 수진과 지훈, 11년 차 부부
수진은 남편이 직접 데리러 오지 않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회사 일”이라며 대신 ‘지훈’을 보냈다. 회사 동기라는 그는 언제나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수진의 손에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지하철 2호선에서 마주친 둘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대신, 수진은 지훈의 왼손에 새겨진 반지 자국을 계속 떠올렸다.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반지가 지금은 없다는 사실.
나를 챙기는 남편보다, 나를 챙기지 못하는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는 남자의 손이 더 뜨거워요.
왜 우리는 그 손에 열광하는가
결혼은 ‘투명한 울타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은밀한 구멍이 우리를 미치게 만든다. 남편 대신 오는 남자는 단순한 대리인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당신은 지켜지지 않아도 된다’는 암시를 주는 프리패스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스킨십 허용 범위’가 남편에게는 점점 좁아지는 반면, 남펹이 아닌 남자에게는 일부러 열려 있다. 그건 배신이 아니라, ‘허락된 배신’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남편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아내는 모르는 척 하면서도 안다. 이중적 거짓말이 주는 황홀함—그게 바로 우리가 기차역에서 맛보는 금단의 미각이다.
닫히지 않는 차문
KTX는 출발했다. 지민은 창밖으로 사라져가는 민호의 손을 보며 문득 물었다.
내가 진짜 원한 건, 남편이 아닌 누군가의 손… 아니면 남편이 나를 포기하는 순간의 쾌감이었을까.
당신은 어젯밤, 이웃집 남편이 당신의 짐을 들어주는 상상을 하며 잠들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과연 당신은 ‘죄책감’을 먼저 떠올릴 것인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겠지’라는 안도감을 먼저 느낄 것인가.
서울역 플랫폼에 아직 남은 사람이 있나요. 아니, 아직 아무도 모르는 당신의 비밀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