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침대 위에 업적이 누워 있었다

그의 승진 소식이 들려온 순간, 나는 그의 입술 대신 KPI가 떠올랐다. 업적이 먼저인 관계, 우리는 아직 출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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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에 업적이 누워 있었다

생각보다 차가운 발끝

밤 열한 시 반. 강남 투룸의 침대는 이미 식었다. 전기장판을 두 겹이나 깔았건만, 발끝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결국 양말까지 신었다. TV는 꺼져 있고, 스마트폰만이 유령처럼 푸른 불빛을 뿜는다.

"이번엔 아시아 전체 실적 1위야."
현관문이 열리며 들어온 준호가 말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들어오는 그의 손끝엔 아직도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묻어 있는 듯하다. 그가 옷을 벗어 던지면서 말했다.

"오늘도 너 생각하면서 버티는 중이었어."

생각한다는 게 나인지, 아니면 나를 통한 너의 업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조용히 이불을 끌어올렸다. 온몸이 달아오르려다가도, 가슴 한복판만은 얼음덩어리처럼 꽁꽁 얼어 있었다.

발끝 대신 입술이 닿기를

그가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들어왔다. 뜨거운 물로 씻어서인지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손이 내 허리를 스쳤다. 따뜻했다. 그러나 그 손이 머무는 곳마다 이상하게도 온도가 아니라 ‘지표’가 떠올랐다.

이 손으로 만든 120% 달성률.
이 입술로 설득한 3개 대기업.
이 가슴으로 획득한 5천만 원 보너스.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그의 숨결이 내 귀에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말했다.

"오늘도 회사 얘기만 할 거야?"

준호는 눈을 반짝였다. 그 눈엔 내가 아니라, 오늘 PT에서 받은 박수갈채가 반사되어 있었다.

"아, 미안. 그냥 오늘 너무 기쁜 거야. 니가 있어서 가능했어."

있어서가 아니라, 지켜줘서가 아니라, 그냥 ‘증거’로 있어서인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어루만졌지만, 그 손끝에선 아직도 회의실의 에어컨 냄새가 났다.

숫자가 사랑을 대신할 때

나는 준호와 만난 지 1,095일째였다. 세 번째 생일을 맞는 연애처럼 숫자가 먼저 떠올랐다. 그가 기억하는 건 우리 첫 데이트 날짜가 아니라, 그날 서류를 요약한 페이지 수였다. 그는 내가 처음 그를 좋아했던 걸 기억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의 첫 승진 축하 주식을 샀다는 건 기억했다.

"너 덕분에 첫 승진 축하도 제대로 했어."

그는 그날도 휴대폰으로 실적 그래프를 보여줬다. 빨간색 막대가 치솟는 그래프 위로, 우리의 미래가 그려졌다. 그래프는 계속 상승했지만, 우리는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사랑한 건 그의 눈빛이 아니라, 그 눈빛에 비친 내 미래였던가.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준호를 사랑한 게 아니라, 준호를 통해 반짝이는 나를 사랑했던 것 같았다. 그의 업적에 반해서가 아니라, 그 업적을 통해 빛나는 나를 사랑했던 것 같았다.

차가운 피부 위로 뜨거운 숨

그날 밤, 준호는 내 목덜미에 숨을 불어넣었다. 뜨거운 숨이었다. 그러나 그 뜨거움은 곧 피부를 스치고 사라졌다. 나는 그의 피부를 만졌다. 차갑다. 그가 성공할수록, 그의 피부는 점점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너무 피곤해. 내일도 새벽 비행기야."

그는 이마를 내 어깨에 기댔다. 그의 머리카락이 내 볼에 닿았다. 부드럽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곧 바람에 흩날리는 메모지처럼 사라졌다.

나는 조용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에선 아직도 화려한 무대의 조명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통해 그의 업적을 만지는 것 같았다.

업적이 누워 있는 침대

나는 결국 그날 밤, 침대를 두 개로 나눠 버렸다. 하나는 준호의 업적이 누워 있는 침대. 다른 하나는 나만의 침대. 나는 두 침대 사이를 오갔다. 준호의 업적이 누워 있는 침대는 화려했지만, 나만의 침대는 조용했다.

"왜 갑자기 따로 자는 거야?"

준호는 물었다. 그의 눈엔 아직도 실적 통계가 반사되어 있었다.

"그냥… 네가 너무 뜨거워서."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그의 뜨거움이 나에게 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뜨거움은 모두 그의 업적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업적이 아니라, 그의 피부, 그의 숨소리, 그의 눈빛을 원했다.

눈동자 속에 나를 찾을 때

며칠 후, 나는 준호의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그 눈동자엔 아직도 업적이 반사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눈동자 속에서 나를 찾으려 했다. 나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나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 눈동자 속에는 나보다 그의 업적이 더 선명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

준호가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곧 그의 업적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말보다 그의 업적이 더 크게 들렸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나는 준호에게 물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 거야, 아니면 나를 통해 너의 업적을 사랑하는 거야?"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답을 찾았다. 나는 준호를 사랑하지만, 준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준호는 나를 통해 그의 업적을 사랑한다.

나는 결국 준호의 업적이 아니라, 나만의 침대를 선택했다. 준호의 업적이 누워 있는 침대는 화려했지만, 나만의 침대는 조용했다. 나는 조용한 침대에서 나만의 숨소리를 듣기로 했다.

침대는 업적으로는 따뜻해질 수 없다.
침대는 사랑으로만 따뜻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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