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한데, 오늘은 손도 안 잡을게요"
카페 테라스에 앉아 담배를 물던 나는 뜬금없이 남자의 손에 빈 종이컵을 쥐어줬다. 그는 초조하게 웃으며 "여기서요?"했지만 나는 이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1년째 아무도 만나지 않는 나는, 낯선 남자의 손을 나 자신보다 더 간절히 멀찍이 밀어내는 연습이 되어 있었다.
문지르는 손끝의 빈자리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아무도 닿지 않는 이 평화 안에서, 나는 누군가의 욕망을 다시 한번 거꾸로 흡수하고 있나.
365일. 정확히 8,760시간 동안 아무도 내 몸에 손을 얹지 않았다. 처음엔 갑자기 들어온 정전 같은 고요였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귀 뒤로 스며오지 않는 침대. 혀 끝에 남는 맛 없이 말라버린 입술. 그렇게 지워진 건 피부 위의 열감만이 아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건네던 미묘한 권력 또한.
그가 먼저 욕망을 드러내면, 나는 그 욕망을 느릿느릿 거절하며 높아지는 연습을 했다. "오늘은 아니야." 한 마디에 상대는 조심스레 몸을 뒤로 뺐다. 그 순간이 내가 가장 강력해지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그 강함이 이제는 발버둥 칠 대상조차 없었다.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으니, 나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긁어낸 두 기억
지우의 침묵 계약
지우(32)는 작년 봄, 오랜 연인과 헤어지며 내게 왔다. 그녀는 샴푸 향기가 진한 머리카락을 한꺼번에 자르고, 한동안 유일하게 만난 이성이 미용실 실장이었다고 했다.
연애 끝나고 첫 주는 뭐가 허전하다 싶었어. 두 번째 주부터는 굳이 외출할 이유가 없었다가. 한 달 째 되던 날 아침, 문득 침대 옆 탁자에 있던 콘돔 한 박스를 봤거든. 유효기한이 3개월 남았길래 전부 쓰레기봉투에 쑤셔 넣었는데, 그때가 진짜 '끝났구나' 싶더라고.
지우는 한동안 강박처럼 남자 동료들과의 대화를 녹음했다. 점심 먹으며 흘린 "그녀 섹스하기 전에 샤워 안 하냐"는 농담도, 퇴근길 지하철에서 들린 술자리 약속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안, 그녀는 그들이 누군가의 욕망 대상이 되는 순간들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바라보지 않는 게 너무 좋았어. 내가 더 이상 누군가의 시선 안에서 움츠러들 필요 없다는 사실이, 처음엔 해방처럼 느껴졌거든
엘라의 냉장고 실험
엘라(29)는 디자인 회사를 다니며, 328일째 아무 관계도 맺지 않고 있다. 그녀는 냉장고 문에 빨간색 마그네틱 숫자를 붙여놓고 하루하루를 세었다. 100일이 넘어가자 숫자가 아닌 **‘사용 중지’**라는 문구로 바뀌었다.
처음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눈을 피했어. 지하철에서 어깨를 스치면 온몸이 굳었고, 회사에서 부서 회식이 잡히면 불참했다. 그러다 200일이 넘어가니까, 오히려 남자들이 나를 피하더라고. ‘저 여자, 좀 이상해’라는 표정이 역력했거든. 그게 너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한 명을 골라 한 달 동안 눈만 맞추고 다녔어. 고작 눈 맞춤이었는데, 그는 결국 엘리베이터에서 피해 나갔지.
엘라는 회사 동료의 마우스패드를 훔쳐와 6개월 동안 손바닥에 눌러댔다. 남자가 쓰던 물건에 자신의 체온을 슬슬 남겨가며, 상대가 더 이상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집착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집착의 방향이 철저히 ‘거부’로 회귀됐을 뿐이다.
공백의 미세먼지
심리학자들은 ‘욕망의 공백’을 간단히 ‘리브리도 억제’라고 부른다. 맞는 말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더 어두운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 바로 권력의 전복이다. 관계에서 상대의 욕망을 확인하고, 그 욕망을 거절함으로써 자신이 능동적 위치에 서는 일. 그러나 누군가를 원하지 않으면, 원하는 이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거꾸로 된 욕망을 연습한다. 상대가 원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 나를 봐도, 나를 원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이 평화는 언제까지 나를 지켜줄까.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는 이 고요함 속에서, 나는 과연 더 이상 누군가의 집착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마지막, 문 앞에 선 너에게
혹시 당신도 지금, 누군가의 욕망을 다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나처럼 365일째,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이 평화를 고수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