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끝의 말
차가운 새벽 2시 17분. 채린은 침대 끝에 앉아 남자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그가 속옷 단추를 하나씩 여며 올라올 때마다 달빛이 살결에 번쩍였다. 여섯 번째 단추가 꿰맞춰지는 순간, 채린은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일곱, 여덟…… 그리고 말했다.
“그래서, 너는 나를 사랑하지?”
남자—준수—는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입은 닫혀 있었다. 채린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사 랑 해. 단어는 두 사람 사이에선 늘 금기였다. 그 대신 준수는 채린의 손목을 잡아 당겼다. 뜨거운 숨이 손등에 닿았다. 속삭였다.
“좋아해.”
혀끝에 붙은 미끄러운 단어
처음엔 단순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열두 살, 엄마가 문 앞에 서서 밥 먹어를 되풀이할 때, 채린은 벽 뒤에서 숨죽여 들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었다. 열여섯, 첫 키스의 밤, 고등학교 옥상—‘선배’였던 효성은 채린의 입술을 훔친 뒤, 귓불에다 고마워를 속삭였다. 맛있는 공기 따위는 없었다. 그 대신 캔맥주 냄새와 담배 피가 섞인 혀끝이 남았다.
대학 2학년, 도서관 지하 벤치. 희진은 채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너는 나한테 특별해.”
그래도 사랑해는 나오지 않았다. 희진은 굳은 표정으로 눈을 피했다. 그날 밤 채린은 화장실 거울 앞에서 혼자 입술을 맞췄다. 사 랑 해. 입안에서 단어가 부서져 나갔다. 미끄러운 조개살처럼 혀끝에 붙어 있었다.
몸으로 보상하는 밤
스물여덟, 퇴근길 지하철. 채린은 전철 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누군가 입에 담았을 텐데. 주변 커플들은 능숙하게 사랑해를 주고받았다. 그 말은 그들의 호흡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날도—오늘의 준수처럼—연인은 ‘좋아해’를 내뱉었다. 아주 크고 따뜻한 ‘좋아해’였다. 하지만 채린의 속은 텅 빈 냉장고처럼 울렸다. 사랑해가 아니면 안 된다. ‘좋아해’와 ‘사랑해’ 사이엔 침대 한 폭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를 메우려 채린은 몸을 먼저 건넸다. 침대 시트에 새겨진 주름 위로 손이 미끄러졌다. 준수의 어깨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혀끝으로 뱃속에 굳은 허기를 긁었다. 가슴을 비볐다. 사랑해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지만, 뜨거운 숨으로 대신했다. 살결에 남은 흔적이 금기 대신 상처를 새겼다.
열쇠 없는 문
서른 한 살, 채린은 스스로를 실험하기 시작했다. 연애마다 조건을 달았다. 먼저 사랑해를 말한 사람이 지면, 지는 쪽이 열쇠를 쥐게 된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채린은 먼저 말했다.
“사랑해.”
거울 속 채린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그 말은 상대의 입이 아니라, 자신의 목구멍에서 역류했다. 준수—그날의 연인은 재빨리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채린은 알았다. 그건 대답이 아니라 도피였다. 들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대꾸. 심리학자들이 말한다. 사랑해를 듣지 못한 아이는 평생 듣지 못할 각오를 한다. 그 말은 권력의 언어이자, 동시에 권력을 포기한 언어다. 누군가에게 말해주는 순간, 말하는 사람은 말을 받는 사람에게 자신의 열쇠를 건네는 셈이다.
채린에게는 그 열쇠가 없었다. 엄마도, 아빠도, 효성도, 희진도, 준수도 모두 열쇠를 쥐고 있었다. 채린은 문 앞에 서서 손을 내밀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복수의 방법
그래서 채린은 복수를 택했다. 당신들도 받지 못하게 해야지. 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되잖아.
침대 위에서 준수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가락 끝으로 턱선을 쓸었다. 준수는 눈을 감았다. 채린은 입을 다물었다. 사랑해를 삼켰다. 대신 준수의 가슴에 입을 맞췄다. 혀끝으로 젖꼭지를 스쳤다. 살결에 닿을 때마다 욕망이 금기로 변했다. 준수는 신음했다.
“말해줘…”
채린은 속으로 웃었다. 말해줄 수 없어. 그 말은 나에게만 남겨둬. 그녀는 준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발가락으로 정강이를 긁었다. 몸으로 보상했다. 사랑해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지만, 뜨거운 살결과 숨소리로 가득 채웠다.
말의 무덤
서른 일곱, 채린은 여전히 사랑해를 듣지 못했다. 대신 수백 번의 좋아해, 고마워, 보고 싶어를 받았다. 언젠가는 들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희미해졌다.
밤마다 채린은 눈을 감고 혼자 말했다.
“사랑해.”
입안에서 단어가 부서졌다. 그리고 눈을 뜨면, 그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현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침대 시트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빈틈은 커져만 갔다.
마지막 질문
당신은 사랑해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그 언어를 몸으로 배운 적이 있는가. 혹시 지금 이 순간, 누군가에게 사랑해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침대 끝에 앉아 있는 당신의 손끝이 닿는 곳—그곳에 아직 말할 수 없는 열쇠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