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내 몸으로 도망친다”
오후 3시 14분, 연남동 테이크아웃 커피숍. 손나은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홀짝이고, 입술에 남은 액체를 혀로 핥았다. 잔뜩 올라간 눈꼬리, 초크처럼 번진 립스틱. 22살, 하지만 오늘은 스물두 번째가 아니라 마지막이라는 각오였다.
“이제 그만할래.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더는 지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연애는 아니었다. 연애 따위로는 표현하기엔 너무 끈적이고 뜨거운 무언가.
거울 속, 너무 빨리 찢긴 속옷
왜 자꾸 걔들이 먼저 떠나지?
손나은은 룸미러에 섰다. 브라렛 한쪽이 찢겨 있었다. 다섯 명의 남자, 다섯 번의 외출. 그녀는 몸을 먼저 내밀었다. 입맞춤이 아닌, 뺨을 스치는 숨결이 아닌, 몸이었다. 그리고 남자들은 받고는 떠났다.
“이기적이라고? 그래. 나는 이제 받기만 할 거야. 입으로 먼저 말하는 건 지겨워.”
연애의 룰은 간단했다. 누군가의 몸을 먼저 원하면 그만큼 먼저 떠날 수 있다. 그녀는 늘 몸을 줬고, 마음은 늘 뒤늦게 따라갔다. 그래서 늘 뒤처졌다. 몸은 말라붙고 마음은 허탈해졌다.
유리, 재훈, 그리고 채원의 눈빛
유리는 동아리 선배였다. 24살, 키 183cm, 연초록 눈동자. 손나은은 첫눈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유리는 손나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친하게 지내자.”
그날 손나은은 유리의 손가락이 재훈의 허벅지를 톡톡 치는 걸 봤다. 유리는 재훈을 원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유리의 카카오톡을 차단했다. 이틀 뒤, 유리는 채원에게 고백했다. 채원은 거절했다.
“나는 연애 안 해. 너무 피곤해.”
채원의 피곤함, 나은의 피곤함
채원은 룸메이트였다. 21살, 늘 머리를 묶고 다녔다. 손나은은 채원에게 물었다.
“왜?”
채원이 대답했다.
“그냥, 끝내고 싶어. 언제나 나는 누군가의 선택이 아니라 대안이었거든.”
그날 손나은은 처음으로 남의 상처를 그대로 흡수했다. 자신의 몸에 스며든 상처처럼. 그녀는 채원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몸이 언제나 대안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끝내고 싶은 마음, 끝내지 못하는 욕망
연애는 끝낼 수 없는 게임이다. 끝내고 싶은 마음은, 사실 끝나지 않은 욕망이다. 환상 속에선 '나는 더 이상 사랑받고 싶지 않아'라고 외친다. 현실에선 아직 누군가의 몸을 먼저 원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
손나은은 22살 연애의 끝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녀의 속끓는 욕망은 아직 살아 있다. 누군가가 먼저 몸을 달라고 하기만을 기다리는, 피곤한 마음. 연애를 끝내겠다는 선언은, 사실 그 반대의 뜻이다.
침대 끝, 혼잣말
새벽 3시 11분. 손나은은 침대 끝에 앉아 스킨톤 팬티를 내린다. 창밖에 불 꺼진 간판이 번쩍인다. 손가락이 가는 대로 속삭인다.
“이번엔 내가 먼저 떠날게. 몸도 마음도 안 줄래. …근데 누가 먼저 달라고만 하면, 또 줘버릴지도 모르겠네.”
손나은은 혼자 웃었다. 22살,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몸을 팔아왔다. 그리고 오늘도, 또 팔아버릴지도 모른다.